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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겸재공휘홍집(중익)행장(謙齋公諱洪鏶(仲翼)仃狀)
겸재공휘홍집행장(謙齋公諱洪鏶仃狀) 옛말에 이르길 한사람의 가치는 그가 幽明을 달리했을 때 나타난다(蓋棺事定)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謙齋가 남기고 간 이승의 발자국은 너무나 크고 깊었다. 謙齋는 나의 孫行이었지만 이승에서의 우리 삶은 마치 형제간처럼 敦篤하였고 親舊처럼 信實하였다. 이제 故人이 된 그를 회상하며 엊그제만 같았던 옛일을 反芻하자니 산다는 것이 뜬구름같이 허무하고 쓸쓸한 생각뿐이다. 허나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취는 뒤따라오는 이의 里程標가 되기 때문에 늘 軒擧함을 잃지 않았던 謙齋의 行狀을 여기에 적음으로써 후세의 龜鑑으로 삼고자 한다. 나는 謙齋의 일생을 三分하여 기술하려는데 편의상 其一分에서는 일제식민지하에서의 성장과 활동을, 其二分에서는 해방후 한국동란을 거쳐 四·一九까지, 其三分은 一九六○년대 이후 그의 행장에 대해 적었다. 其一分 그가 태어났던 一九一七년은 日帝植民統治가 이 나라를 점점 옥죄어 가던 때였다. 山川草木은 얼어붙고 민심은 날로 피폐해져 갔다. 나라가 그 모양이었으니 個人이나 家政事는 더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謙齋는 廣川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住岩面 서기생활을 하며 청년시절을 보냈다. 틈만 나면 通信講義錄을 들여다보며 그야말로 晝耕夜讀의 나날을 보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彛倫을 다했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信望을 샀다. 一九四○년대에 들어서 日帝는 한국수탈에 狂奔하였고 전쟁을 위한 식량증산에 박차를 가하였다. 주암면 접치에서도 식량증산을 위한 貯水池 조성공사가 시작되었는데 謙齋가 총책을 맡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토목공사였으며 저수지가 완공되자 天水畓을 면치 못했던 주암면 소재 논 가운데 상당부분이 水利畓으로 바뀌게 되었다. 주암저수지 하면 謙齋를 떠올릴 만큼 謙齋와 주암저수지는 깊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其二分. 해방이 되자 사회는 자못 어지러웠다. 벽지인 주암에서도 建準이 들어서고 평소에는 멀쩡했던 사람들이 左翼이다 右翼이다 외쳐대며 서로를 모함하고 不信의 벽을 쌓았다. 심지어는 宗親間에도 등을 돌리고 미움의 세월을 살아야만 했다. 一九四八년 麗·順反亂사건은 이같은 사상적인 갈등이 군사적인 도발로 나타난 것이었으며 一九五○년 六·二五동란은 不信과 反睦의 外延이었다. 낮에는 우익이요 밤에는 좌익이 득세하는 어둠의 세월이 지속되었다. 이같은 朝不慮夕의 시대를 謙齋는 그 특유의 德과 知로 무난히 돌파하였다. 無辜와 모함이 판을 치던때 謙齋는 억울하게 당할 뻔했던 사람들의 伸冤에 앞장섰으며 그렇게 해서 生命을 부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당시만 해도 경제사정은 말이 아니었기에 보통사람들이 체면을 유지하고 산다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다. 때문에 피를 나눈 宗親間에도 사상적인 대립과 갈등은 예외가 아니었다. 민족의 갈등도 서러웠거늘 하물며 骨肉間의 相爭이야 더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누구도 나서길 꺼리고 잘못했다간 오히려 나선자의 생명이 위태로웠을 때 謙齋는 噬臍之患을 치유하는데 발벗고 나섰다. 이무렵 謙齋는 住岩水利組合長을 맡고 있었다. 해방—미군정—六·二五동란 등을 거쳐 사회는 그런대로 안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李承晩의 자유당 정권은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정말 본의 아니게 謙齋와 나는 자유당원이 되었다. 정치 때문에 집안이 分裂되어서는 안된다는 一念下에 謙齋와 나는 자유당에 소극적이었고 집안의 대동단결을 위해 勞心焦思하였다. 四·一九로 자유당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득세하였다. 謙齋는 본래의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 바깥 출입을 삼가고 평소 생각대로 晝耕夜讀에 정진하며 이웃과 더불어 조용히 살아가는 삶을 시작하였다. 其三分 위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八남매를 둔 謙齋는 孝行과 嚴父의 도리를 잠시도 잊지 않았고 糊口之策으로 소규모의 打綿, 搗精공장을 운영하며 스스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이웃과 農酒를 나누며 전원생활을 즐겼다. 豪放했던 고의 품성은 公職에 있었을 때나 野에 묻혔을 때나 다를 바 없었다. 孔子말씀에 나이 四○이면 不惑이라 했지만 謙齋는 四○을 갓 넘긴 나이에도 無爲自然의 생활에 거침없이 순응했음은 그의 내면적인 삶이 어떠했는지를 능히 짐작케 한다. 一九六○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國民改革運動은 전국의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당시의 개혁운동은 朴正熙장군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시골에서는 초가집을 없애고 농로와 마을길을 넓히는 등 가히 破天荒的인 일들이 벌어졌다. 사람들 사이에 또다시 긴장이 감돌고 이해가 엇갈렸다. 謙齋는 다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합치는데 앞장을 섰다. 자신이 사는 竹林마을부터 솔선수범하여 초가집을 허물고 농로를 넓혔고 마을길을 확장하였다. 이웃마을 사람들이 뒤따라갔고 面이 뒤따랐으며 郡이 뒤따랐다. 郡·道·内務部에서 표창이 잇따랐다. 農村文化向上표창(一九六三·一·二一·전남지사), 내무부장관 감사장(一九六三·九·四), 새마을모범부락표창(一九七二·一·二五·전남지사), 無窮花훈장(一九八一)등이 그러했다. 草野의 謙齋는 一九七二년부터 一九八七년 幽明을 달리하기까지 平和統一政策諮問會議 위원과 統一主體國民會議대의원을 역임하였다. 스스로 원해서 맡은 것이 아닌 떠밀려 걸머진 짐이었다. 謙齋는 늘 그렇게 인생을 살았다. 功名에 있어서 그는 늘 뒤로 물러섰고, 實利에 애써 둔감하였다. 떠밀면 마지못해 움직였으며 일단 運身을 하면 運身의 熱과 誠을 다했다.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는 자세로 한평생을 살았다. 그는 一九八七년 정월 보름날, 자식들이 잘자라 世俗의 榮華를 만끽할 즈음에 이승을 떠났다. 嗚呼痛哉라, 섧고 섧도다. 崇祖愛族에 남달랐던 謙齋, 中庸과 知德을 俱有했던 謙齋, 그대가 떠나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음을 가슴아파하며 저승에서나마 便히 永眼하시길 두손모아 빌며 亂筆을 絶한다. 戊寅年 十二月 日 大同譜編纂委員長 曉山 圭詢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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